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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Rosetta, 1999) 숨 쉴 틈 없는 생존의 리듬과 도움 아닌 간섭의 세계 속의 배신과 책임 사이

by 마인드네비게이션 2025.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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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 쉴 틈 없는 생존의 리듬

《로제타》는 95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안에서 단 한순간도 관객이 긴장을 놓을 수 없게 만듭니다.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생존'**의 리듬으로 움직이며, 여주인공 로제타의 일상은 끊임없는 전투입니다. 그 전투는 거창한 사회 운동도, 드라마틱한 반전도 아니며, 그냥 오늘 하루를 견뎌내는 것. 이토록 압축적이고 직접적인 생존의 감각을 스크린 위에 그대로 옮긴 작품은 드뭅니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로제타는 달리고 있습니다. 제빵 공장에서 해고당한 그녀는 경비원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공장을 빠져나오기까지 온몸을 던집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해고의 순간이 아니라, 그녀가 세상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서문입니다. 세상은 로제타에게 냉혹하고, 그녀는 그 냉혹함에 맞서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여야만 합니다. 이 영화는 그렇게 몸의 언어, 리듬, 걸음, 호흡, 숨소리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다르덴 형제는 이 작품에서 핸드헬드 카메라를 극단적으로 활용합니다. 관객은 마치 로제타의 등 뒤를 따라다니는 또 다른 존재처럼, 그녀의 긴장과 불안, 고통을 고스란히 체험하게 됩니다. 카메라는 거의 인물의 목 뒤에 붙어 움직이며, 때로는 그녀가 넘어지고 주저앉을 때 카메라도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이런 연출은 로제타라는 인물의 감정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겪고 함께 지쳐가는 방식으로 관객을 몰아넣습니다.

로제타는 단순히 가난한 청년이 아닙니다. 그녀는 존엄성을 잃지 않으려는 자입니다. 공장에서 쫓겨나고, 가스가 끊긴 트레일러에서 알코올 중독인 엄마와 살아가며, 그나마 주워들은 생선이나 옷가지를 팔아 근근이 연명합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로제타는 도움을 받지 않습니다.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통해 얻은 적은 수입에도 "나는 정상적인 삶을 원한다"라고 말하며, 은근히 동정이나 시혜를 거부합니다. 이 점에서 로제타는 비참한 현실을 소비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저항적인 주체로 기능합니다.

로제타의 생존 리듬은 끝없는 절제와 반복입니다. 일상을 버티고, 밥을 해 먹고, 신발을 고치고, 불을 붙이고, 다시 일자리를 찾습니다. 반복은 지루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 생존을 위한 전략으로 나타납니다. 이 과정 속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강인함은 단순한 캐릭터의 성격이 아니라, ‘삶의 조건이 만들어낸 몸의 대응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선명한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는 점입니다. 로제타는 생존을 위해 어떤 도덕도, 친구도, 믿음도 저버릴 수 있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마주해야 합니다. 가까스로 자신을 챙겨주는 친구를 배신하고, 그의 일자리를 빼앗는 장면은 많은 관객에게 충격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비난으로 끝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도덕과 우정이 ‘굶주림’ 앞에서는 얼마나 무기력한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로제타》는 화려한 언어 없이도 무수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가난은 말이 없고, 행동만 있다'는 점을 이 영화는 처절할 만큼 일깨워줍니다. 로제타의 리듬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누군가가 겪고 있을지도 모를 현실의 리듬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단순한 페르소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가 외면한 리듬을 시청각적으로 복원한 다큐멘터리적 픽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도움 아닌 간섭의 세계

《로제타》는 단순히 빈곤과 생존을 그린 영화가 아닙니다. 이 영화가 더욱 뼈아픈 이유는, 로제타가 살아가는 세계가 ‘돕는다’는 이름의 간섭과 폭력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삶에 개입하며, 그것을 ‘선의’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다르덴 형제는 이 영화에서 그 선의가 얼마나 무심하고 위선적일 수 있는지를, 냉정하게 들춰냅니다. 로제타는 그런 세상과 맞서며, 오히려 고립을 자처합니다. 왜냐하면 ‘도움’이라는 말이 그녀에겐 곧 존엄성의 침해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로제타는 한결같이 ‘정상적인 삶’을 외칩니다. 학교에 다니고, 직업이 있고, 친구가 있고, 매일 같은 시간에 출퇴근하는 그런 삶.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어른들은 그녀가 그 길로 나아가는 데 별 관심이 없습니다. 엄마는 알코올 중독자이며, 로제타의 돈으로 술을 사 마십니다. 정부는 마지못해 사회보장금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하지만, 그것은 지속적이고 책임 있는 돌봄이 아니라 ‘처리해야 할 문제’로 로제타를 바라볼 뿐입니다. 심지어 로제타가 겨우겨우 발을 디딘 생선가게의 사장조차, 처음에는 선의처럼 굴지만 결국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그녀를 대합니다.

가장 뼈아픈 장면은 로제타가 친구 리케에게 배신하는 장면입니다. 리케는 로제타를 도와주고, 일도 소개해 주며, 자신의 가게에 데려갑니다. 그는 나름대로 그녀에게 진심을 다하려 애쓰지만, 로제타는 그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그를 속이고, 그가 일하는 자리를 탐냅니다. 관객으로서 이 장면은 무척 불편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 불편함이야말로 이 영화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정말로 로제타가 리케에게 빚졌는가?” 라는 물음이죠.

로제타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도움, 자신에게 조건을 전제하는 친절에 대해 철저히 경계합니다. 도움의 손길이라는 것이 항상 대등하지 않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는 자’와 ‘받는 자’를 분명히 구분 짓고, 로제타를 항상 아래에 놓습니다. 다르덴 형제는 이 점을 통해, 현대 사회의 위선적인 복지, 시혜적 도덕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영화 속 로제타는 결국 외롭고 고립된 존재로 남지만, 바로 그 고립 안에 그녀의 ‘자존심’과 ‘선택’이 존재합니다.

또한,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간섭은 단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영화 속 로제타는 시스템적인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합니다. 실업 수당, 보호시설, 공공 의료 등 어느 것도 그녀를 실제로 지탱해주지 않습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사회는 단지 바라보기만 합니다. 마치 “그래도 우리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라고 말하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 그 시스템은 그녀를 구해내지 못합니다. 이 점에서 영화는 매우 현실적이며, 동시에 구조적입니다.

다르덴 형제는 로제타를 구원받는 존재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녀는 결코 구제되지 않으며, 마지막 순간에도 물속에서 스스로 기어 올라옵니다. 누군가 그녀를 끌어올려주는 손길은 없습니다. 카메라는 그저 그녀의 고통을 따라갈 뿐, 어떤 해석도, 위로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는 다르덴 영화 특유의 윤리적 태도입니다. 관객이 섣불리 감정이입하거나 동정을 품는 대신, 질문하게 만들고, 생각하게 합니다.

‘도움이 간섭이 되는 순간’은 실제 삶에서도 흔하게 마주치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뜻으로 타인을 도우려 해도, 그것이 상대에게 강요가 되거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다는 점을 이 영화는 일깨워줍니다. 로제타는 그런 간섭을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을 지켜냅니다. 그녀는 불친절하고, 무뚝뚝하며, 사회성이 부족해 보이지만, 동시에 자기 삶의 조건에 대한 가장 철저한 투쟁자입니다.

결국, 《로제타》는 ‘도움’이라는 단어가 갖는 이중성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선의로 포장된 간섭이 얼마나 쉽게 타인의 삶을 지배하려 드는지를, 그리고 그 지배에 저항하는 한 소녀의 처절한 고립을 통해, 우리는 이 사회가 얼마나 비대칭적인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입니다.

 

🎬 배신과 책임 사이

《로제타》의 핵심은 고요하고도 잔혹한 선택의 딜레마에 있습니다. 영화의 후반부, 주인공 로제타는 친구이자 일자리를 소개해준 리케(Riquet)를 배신합니다. 누군가는 이 장면을 두고 “양심의 붕괴”라며 손가락질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르덴 형제는 이 단순한 도덕적 해석을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로제타가 내리는 결정은 죄의식이나 불의가 아닌,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가장된 생존의 본능에 가깝습니다.

로제타는 단지 살고 싶습니다. 사람답게, 법에 어긋나지 않게, 정규직을 얻고 월급을 받으며 평범한 삶을 원합니다. 하지만 그 평범함조차 그녀에겐 너무 먼 꿈처럼 보입니다. 리케는 그녀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함께 있는 시간을 나누며, 유일하게 인간적인 접촉을 허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리케가 가진 생선가게의 일자리는 그녀에게 ‘안전한 삶’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출구로 보입니다.

이 지점에서 로제타는 인간적인 유대와, 생존의 책임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습니다. 이는 단지 로제타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이 마주하게 되는 선택의 프레임은 종종 이렇습니다. “착하게 살지만 굶을 것인가, 아니면 죄를 짓더라도 살아남을 것인가.” 영화는 그 어느 쪽도 쉽게 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통렬히 보여줍니다. 로제타는 고심 끝에 리케가 가게에서 몰래 가스를 빼내 팔고 있다는 사실을 고발합니다. 사장은 로제타에게 자리를 주며 감사하다고 말하고, 로제타는 마침내 그토록 원하던 ‘정상적인 삶’을 얻은 듯 보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밝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굳고 차갑습니다. 다르덴 형제는 여기서 ‘승리의 대가’를 묻습니다. 이 자리는 그녀가 원했던 삶의 조건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유일한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스스로에게 낙인을 찍게 만든 결과이기도 합니다. 로제타는 단지 ‘배신자’가 아니라, 사회가 강요한 선택 속에서 도덕과 책임이 충돌하는 지점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놀라운 점은, 로제타가 그 이후에도 단순히 자리를 차지한 채 안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결국 자신이 한 행동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리케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비로소 우리는 로제타가 단순히 배신자이기를 거부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녀는 책임의 무게를 감당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는 다르덴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윤리적 주제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실수할 수 있지만, 그 실수를 응시하고 책임질 수 있다면 여전히 ‘인간다운 존재’ 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르덴 형제는 로제타를 불쌍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녀를 희생자로 그리는 대신, 끊임없이 행동하고 선택하는 도덕적 주체로 그립니다. 이는 영화가 감정에 기대지 않고 윤리적 긴장감으로 관객을 끌고 가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로제타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리케 앞에서 무너질지언정 다시 그에게 다가갑니다. 그것은 단순한 사과 이상의 의미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이자, 다시금 인간이 되겠다는 자기 복원입니다.

《로제타》의 이 마지막 선택은 그 어떤 극적인 연출보다 강력한 여운을 남깁니다. 관객은 “그녀가 잘못했는가?”라는 질문에서 “이 사회는 그녀에게 어떤 선택지를 주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다르덴 형제가 이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관객에게 던지는 윤리적 질문입니다. ‘배신’과 ‘책임’은 종이 한 장 차이이며, 때로는 같은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것. 우리가 쉽게 정의하려는 이 두 단어는, 가난하고 외로운 삶 속에서는 도무지 구분되지 않는 형태로 얽혀 있습니다.

로제타는 그런 경계선 위에서 끝까지 살아가려는 사람입니다. 무너지면서도 일어나는, 거짓을 범하면서도 진실을 갈망하는, 바로 우리와 닮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무겁고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로제타의 배신은 결코 그녀만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할 사회적 질문이자, 존재의 윤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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