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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The Graduate, 1967) 수영장 끝에서의 방황과 엉킨 어른의 세계의 침묵 속에 깃든 외침

by 마인드네비게이션 2025.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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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 끝에서의 방황

《졸업》의 초반부를 지배하는 이미지는 무엇보다도 수영장입니다. 벤자민 브래독은 대학을 갓 졸업한 엘리트 청년이지만,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채 수영장 옆 의자에 늘어져 있습니다. 그의 부모는 성공적인 미래를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지만, 벤은 그 말들에서 삶의 방향성을 전혀 찾지 못합니다. “플라스틱에 주목하라”는 조언이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것은, 그것이 실질적인 해결책이라기보다는 세대 간 단절을 드러내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이 수영장이라는 공간은 벤의 혼란과 무기력, 나아가 이 시대 청년들의 정체성 위기를 시각적으로 표현해 줍니다. 겉보기에는 호화롭고 여유로워 보이지만, 그 물속과 주변에는 벗어날 수 없는 막막함이 감돕니다. 그는 수영복을 입고 물속에 몸을 담그기도 하고, 튜브에 몸을 맡긴 채 표류하듯 떠 있기도 합니다. 그 장면들은 벤이 스스로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한 채 부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줍니다.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마음과, 어떤 식으로든 변화의 계기를 찾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그는 극심한 방황을 겪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벤이 이 방황의 끝에서 선택하게 되는 행동이 어른들의 세계와의 ‘불륜’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도덕적 판단을 떠나, 그가 지금 처한 사회적 틀과 기성세대의 기대에 대한 무언의 저항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미시즈 로빈슨과의 관계는 단순한 성적 호기심이 아니라, 사회의 위선과 목적 없는 삶의 흐름에 대한 반항의 몸짓으로 볼 수 있습니다. 벤은 자신이 몰입할 수 있는 무엇이 필요했고, 불륜이라는 금기를 넘음으로써 기성세대의 질서에 맞서게 됩니다. 하지만 그 선택조차도 결국에는 그를 더 큰 혼란 속으로 이끌어 갑니다.

영화 중반 이후, 벤이 수영장에 누워 있는 장면들이 반복되면서 그 공간은 점점 '행동하지 않는 자의 상징'으로 변해갑니다. 부모는 그에게 여전히 뭔가를 강요하고 있지만, 벤은 더 이상 귀 기울이지도 않고, 그저 무표정하게 물속에 잠긴 채 있습니다. 심지어 그가 수면 아래로 잠수할 때는 세상의 소음이 사라지고, 마치 태아처럼 외부와 단절된 새로운 공간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벤은 물속에서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지만, 그 안에서도 해결책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 장면들을 통해 영화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벤의 방황은 단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당대 미국 청년 세대가 처한 문화적·정서적 혼란을 대변하게 됩니다. 《졸업》이 1967년에 개봉되었음을 생각해 보면, 이는 당시의 시대적 공기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1960년대 말은 미국 사회가 급격히 변화하던 시기였고, 베트남 전쟁, 인권운동, 세대 갈등이 폭발하던 시대였습니다. 벤의 정체성 혼란은, 단지 한 청년의 성장통이 아니라, 시대가 만들어낸 구조적 혼란의 결과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결국 벤은 수영장이라는 공간을 벗어나 행동에 나서게 되지만, 그 이전까지의 긴 방황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어떤 답도 쉽게 나오지 않는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영장 끝’은 단순한 물리적 경계가 아니라, 상징적인 경계입니다. 그곳에 서 있는 벤의 모습은 관객에게 지금 내가 선 자리는 어디인가, 나는 지금 어떤 물속에 잠겨 있는가를 되묻게 합니다.

엉킨 어른의 세계

영화 《졸업》이 단순한 로맨스나 청춘 성장물에 머무르지 않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이 영화가 '어른의 세계'를 어떻게 묘사하고 비틀어내는가에 있습니다. 벤자민 브래독은 표면적으로는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미래가 촉망되는 청년입니다. 하지만 그가 발을 들이는 '어른들의 세계'는 그가 상상했던 이성과 질서의 공간이 아니라, 위선과 기만, 불안으로 뒤얽힌 정글과도 같은 곳입니다.

이 복잡한 어른들의 세계를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미세스 로빈슨’입니다. 그녀는 벤보다 나이도 많고, 결혼도 했으며, 사회적으로도 안정된 위치에 있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공허한 삶을 벤이라는 젊은 남성과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통해 메우려 합니다. 처음에는 성적인 유혹으로 시작되지만, 그 안에는 미시즈 로빈슨의 정서적 결핍과 자기혐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끼고자 하는 비틀린 욕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영화는 어른들의 세계를 단순히 권위 있는 질서로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젊은이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 그 안에 들어가 보면 더 혼란스럽기만 한 세계로 묘사합니다. 벤이 미세스 로빈슨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 그는 점점 더 그 세계의 부조리함을 몸소 체험하게 됩니다. 그 관계는 단순한 쾌락이나 실험이 아니라, 그를 점점 도덕적으로 무감각하게 만들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진정성을 잃게 만듭니다.

더욱 흥미로운 부분은 미세스 로빈슨의 남편, 즉 벤의 부모 친구이자 자신의 ‘멘토’ 역할을 해왔던 로빈슨 씨와의 관계입니다. 그는 벤에게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결국 자신의 아내와 아들의 친구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 앞에서 무너져 내립니다. 이 장면은 어른들이 정작 스스로 세운 질서를 지키지 못하면서도 젊은 세대에게는 그것을 강요한다는 이중적인 태도를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벤은 이 관계들을 통해 어른들의 세계가 결코 일관되지 않으며, 오히려 자기모순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벤의 부모입니다. 그들은 아들의 미래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계획하고 간섭하지만, 정작 그 미래가 어떤 인간적인 의미를 갖는지는 전혀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체면’과 ‘성공’이며, 벤이 실제로 무엇을 원하고,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습니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성공한 기성세대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식의 내면에 무관심한 전형적인 ‘소외된 부모’입니다. 벤은 이런 부모의 태도를 통해, 어른이 되는 것 자체가 정체성의 완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점차 깨달아 갑니다.

‘엉킨 어른의 세계’라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복잡하고 모순된 세계를 상징합니다. 그 안에서 젊은 세대는 성장해야 하지만, 동시에 이 세계에 대한 회의와 저항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벤의 불륜은 물론 비도덕적이지만, 그것을 통해 영화는 오히려 ‘왜 이런 선택밖에 할 수 없었는가’를 역설적으로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영화가 단순히 벤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당시 1960년대 미국 사회 전체에 던지는 비판으로 확장됩니다.

결국, 벤은 이 어른들의 세계를 전적으로 거부하지도, 완전히 수용하지도 못한 채 방황합니다. 그리고 그 방황의 끝은 엘레인과의 결혼식장 난입이라는 일탈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기성 질서에 대한 일종의 파괴 행위이며, 동시에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적 몸짓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말의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이 버스에 앉아 점점 무표정해지는 그 순간, 우리는 다시금 묻게 됩니다. 과연 이들이 도망쳐 나온 어른들의 세계와 얼마나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엉킨 어른의 세계’는 단순히 잘못된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나 결국은 발을 들이게 될 복잡한 현실이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곧 성장이자 인생입니다. 《졸업》은 이 과정을 이상화하지도 않고,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으며, 그저 날카롭게 관찰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이 영화는 지금 봐도 여전히 유효하며, 세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공감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침묵 속에 깃든 외침

《졸업》이라는 영화는 대사보다 ‘침묵’이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하는 작품입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긴 설명 없이도 관객의 마음을 뒤흔드는 상징적인 순간으로, 시대를 초월한 감정의 공명을 이끌어냅니다. 이 영화의 진정한 울림은 격정적인 말이나 격렬한 행동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드러나는 내면의 갈등과 외침에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졸업》을 걸작으로 만든 핵심입니다.

벤자민은 영화 전반에 걸쳐 말수가 적고, 어딘가 멍한 얼굴로 세상을 바라보는 인물입니다. 그는 부모의 질문에도 건성으로 대답하고,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명확한 의견을 거의 드러내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청년 같지만, 그의 표정과 눈빛, 침묵으로 이어지는 순간들은 오히려 더 많은 감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 세대와 사회로부터 받은 압박, 자신의 삶에 대한 방향 상실, 그리고 정체성의 혼란에서 오는 깊은 피로감입니다.

특히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수영장 장면은 이 침묵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벤이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모습은 마치 현실로부터 도피한 듯한 상태를 보여줍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그저 부유하는 그 모습은, 겉으로는 무기력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깊은 절망과 저항의 메시지를 품고 있습니다. 그것은 벤만의 ‘침묵 속 외침’인 것입니다.

또한 엘레인을 향한 사랑 역시 처음에는 말보다 행동으로, 그리고 결국은 비언어적인 절박함으로 표현됩니다. 엘레인의 결혼식장에 난입하는 장면에서 벤은 단 한마디, “엘레인!”이라고 외칩니다. 하지만 그 외침은 단순한 사랑의 고백이 아닙니다. 그것은 절망의 시대 속에서 진실과 자유를 향한 절박한 외침이며, 벤 자신의 삶을 향한 마지막 몸부림이기도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토록 침묵했던 인물이었기에 그 한 번의 외침이 더 강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외침은 단순한 승리로 끝나지 않습니다. 벤과 엘레인이 손을 잡고 버스를 타고 도망친 이후, 두 사람은 처음엔 웃음을 짓지만 점점 무표정해집니다. 이 장면은 대사 하나 없이도 말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을 전합니다. 그들은 과연 자유를 향해 나아간 것일까요? 아니면 충동적인 탈출을 했을 뿐, 더 큰 혼란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요? 이 침묵은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아닌 열린 결말로, 관객 각자의 해석을 기다립니다.

이 마지막 장면은 지금까지 쌓아온 ‘침묵의 미학’을 정점으로 끌어올립니다. 벤과 엘레인의 얼굴이 점점 굳어가는 그 긴 호흡의 장면에서, 관객은 마치 그들과 함께 현실의 무게를 감당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낍니다. 그 침묵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선택이 옳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어른이 된다는 건 무엇인가?” — 이처럼 대사 하나 없이도 깊은 사유를 끌어내는 힘이 《졸업》의 위대함입니다.

더불어 영화 전반에서 삽입된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의 노래들, 특히 ‘The Sound of Silence’는 이러한 침묵의 주제를 더욱 강하게 다듬어 줍니다. 이 노래는 단지 배경음악이 아니라, 벤의 내면을 대변하는 또 다른 목소리로 기능합니다. “Hello darkness, my old friend…”라는 가사처럼, 벤은 침묵과 어둠 속에서 자기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정은 말로 표현되기보다는, 오히려 음악과 침묵의 틈새에서 더욱 진하게 전해집니다.

결국 《졸업》은 말하지 않는 순간들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영화입니다. 그것은 대사가 아니라 눈빛과 움직임, 음악과 정적을 통해 전해지는 내면의 진실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수십 년간 사랑받아온 이유는, 그런 ‘침묵 속의 외침’이 시대를 초월해 사람들의 가슴에 와닿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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