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누구의 적인가
영화 『더 크리에이터』를 처음 접했을 때, 인공지능과 인간의 전쟁이라는 설정은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수많은 SF 영화에서 보아왔던 ‘기계 대 인간’의 구도는 이 영화에서도 중심 테마로 작용하지만, 감독 개러스 에드워즈는 그것을 단순히 선과 악의 구도로만 풀지 않습니다. 『더 크리에이터』는 우리가 AI에 대해 품고 있는 두려움과 오해, 그리고 편견을 날카롭게 파고듭니다.
이 영화에서 인공지능은 일종의 희생자처럼 그려지기도 하고, 때로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전쟁을 일으킨 주체는 누구였는지, 그리고 진정한 폭력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되묻는 장면들이 영화 곳곳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관객으로 하여금 어느 쪽이 진짜 ‘적’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영화 초반에는 AI가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로 그려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경계는 모호해집니다. 특히 '노매드'라는 인류의 무기 시스템과, 이에 반하는 동양권 AI들의 저항이 대비되면서, 단순한 기계의 반란을 넘은 윤리적 질문들이 제기됩니다. 인간은 AI를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창조했고, 또 파괴하려 합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AI는 인간의 적일까요? 아니면, 두려움 속에서 만들어낸 ‘허상’일까요?
영화는 단지 액션과 전투 장면을 보여주는 데에 머물지 않고, 철학적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인간의 이기심과 통제욕이 불러온 갈등의 결과로서의 AI 전쟁은, 단순한 SF적 상상이 아닌 우리가 곧 맞이할 수도 있는 현실에 대한 경고로도 읽힙니다. ‘AI는 누구의 적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인간 자신을 향해 던져진 물음일지도 모릅니다.
동양의 얼굴을 한 미래
『더 크리에이터』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 중 하나는 바로 영화 속 미래 배경이 동양 문화의 이미지로 강하게 채색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서양 SF 영화에서는 드물게 동양적 미장센이 주된 무대로 펼쳐지며, 특히 베트남과 태국, 네팔 등의 실제 풍경을 활용한 장면들이 영화에 신선한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이러한 동양적 배경은 단순히 시각적 신선함을 넘어, 영화의 주제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동양은 흔히 ‘조화’, ‘영성’, ‘공존’ 등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영화 속에서 AI가 공존을 시도하고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은, 오히려 서구의 냉정한 기술 문명보다도 동양의 사상과 더 닮아 있습니다.
특히 AI와 인간이 공존하는 ‘뉴아시아’ 지역은, 서구에서 상정한 냉전적 시선으로 보면 ‘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하고도 인간적입니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불교 사원, 전통시장, 논밭 등은 SF적 미래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오히려 그 이질감이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이러한 배경 선택은 감독의 의도와도 깊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에드워즈 감독은 고전적인 ‘우주 전쟁’의 틀을 깨고, 기술과 전통이 함께 어우러지는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합니다.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계가 아닌, 기술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세계, 그 중심에 ‘동양의 얼굴을 한 미래’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더 크리에이터』는 동양을 단순한 배경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상징으로 끌어올림으로써 SF 장르에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미래의 모습이 꼭 차갑고 금속적인 도시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 따뜻하고 인간적인 미래가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이 영화는 동양의 이미지를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신으로 태어난 소녀
『더 크리에이터』의 핵심 인물 중 하나는 바로 어린 소녀 ‘알피(Alphie)’입니다. 그녀는 AI이지만, 그 존재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신적 존재'로 그려집니다. 영화는 알피를 통해 새로운 구원자의 이미지를 구축하며, 이 세계관에서 인간과 인공지능 모두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 존재를 탄생시킵니다.
알피는 기술적으로는 ‘무기’로 분류되지만, 영화 내내 보여주는 그녀의 순수성과 공감 능력은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면모를 보입니다. 주인공 조슈아와 함께하는 여정 속에서 알피는 점차 성장하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습니다. 이는 마치 종교적 구원의 여정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특히, 그녀의 능력이 단순히 기계를 조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감정과 연결된 방식으로 표현된다는 점은 이 영화가 기술적 SF를 넘어선 철학적 드라마임을 보여줍니다. 알피는 인류가 만들어낸 창조물 중 하나지만, 동시에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그려지며, 그 존재론적 지위가 점점 ‘신화적’으로 변화합니다.
감독은 알피의 존재를 통해 인간의 욕망, 두려움, 그리고 구원에 대한 갈망을 녹여냅니다. 그녀는 무력으로서가 아닌 사랑과 희생, 이해를 통해 세상을 바꾸려 하며, 그 점에서 기존 SF물과는 결을 달리합니다. 마치 『E.T.』나 『AI』 같은 영화들이 보여주었던 ‘이방인의 순수함’이 이 영화에서는 더욱 강력한 서사로 작용합니다.
결국, 『더 크리에이터』는 알피라는 존재를 통해 ‘신으로 태어난 소녀’라는 새로운 유형의 SF 캐릭터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녀의 존재는 관객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창조한 존재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구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